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Stalin_1894.jpg|width=200]]|| || 1894년, 15살 소년기의 스탈린 ||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 [[조지아]] 동부의 고리(გორი, Gori)시의 [[오세트인|오세트계]] 제화공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 케케 겔라제의 슬하 삼남으로 태어났다.[* 러시아의 시인 [[오시프 만델시탐]]의 1933년 풍자시 "크렘린의 높으신 분"(Кремлёвский горец)에 보면 "Что ни казнь у него - то малина / И широкая грудь осетина"(그가 내리는 처벌은 달콤하기 그지없고 / 그의 오세트인 가슴은 참으로 넓도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항목 참조.][* 1938년 소련에서 출판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일을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놓고 있다.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조지아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그가 태어난 해는 1878년 12월 18일이 맞다고 한다.] 스탈린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는데, 위로 미헤일과 기오르기 두 형이 있었는데 모두 태어난 지 몇 달 안돼서 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통적인 구두공이었던 스탈린의 아버지는 자신이 하던 구두공 일이 잘 되지 않자 큰 상심에 빠졌고,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과음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아주 어릴 적에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랐다. ||[[파일:external/burusi.files.wordpress.com/e18391e18394e183a1e18390e183a0e18398e1839de1839c-e183afe183a3e183a6e18390e183a8e18395e18398e1839ae18398.jpg|width=100%]]||[[파일:external/burusi.files.wordpress.com/e18393e18394e18393e18390-e28093-e18394e18399e18390e183a2e18394e183a0e18398e1839ce18394-e18399e18394e18399e18394-e18392e18394e1839a.jpg|width=100%]]|| ||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 베사리온 이바네스 제 주가슈빌리(ბესარიონ ივანე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Besarion Ivanes dze Jughashvili). 1850. (월일 불명) ~ 1909. 8. 25. 베사리온은 생년밖에 기록이 없다. 그나마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아버지, 즉 스탈린의 친할아버지가 이바네(ივანე, Ivane)라는 것이다(또는 에드바르트 라진스키의 자료를 따라서 바노·Вано). [[조지아어]]에서는 자녀의 이름 뒤 아버지의 이름에 관형격 조사와 '제(ძე, dze)'가 붙기 때문. 스탈린의 초명이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인 것은 '주가슈빌리 가문 베사리온의 아들 이오세브'임을 뜻하는 것처럼, 베사리온의 이름은 '주가슈빌리 가문 이바네(바노)의 아들 베사리온'임을 뜻한다. 그래서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의 조지아어식 이름 또한 이아코브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가 된다.] || 어머니 케케 겔라제[* 에카테리네 (케케) 기오르기스 아술리 겔라제(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კეკე) გიორგის ასული გელაძე, Ekaterine (Keke) Giorgis asuli Geladze. 1858. 2. 5. ~ 1937. 6. 4.] || 스탈린의 아버지인 베사리온은 제화공이었으며 소작 농노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케케 역시 농노의 딸이었다. 둘 다 문맹이었고 농가 출신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벨기에의 역사학자이자 노동당 당수인 뤼도 마르턴스(Ludo Martens)는 스탈린이 몇 명 안 되는 평민 출신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고 주장했다.[* Another View of Stalin, Ludo Martens, 1996 p.15] 베사리온은 술주정뱅이에 성질이 매우 거칠어 아내와 아들에게 폭력을 일삼았다.[* 하도 학대당했던 나머지 스탈린은 언젠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벼른 적이 있었고 실제로 자신을 때린 아버지에게 단검을 던졌다. 결국 스탈린은 가출해야 했고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스탈린 강철권력'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그 당시 스탈린이 겪은 무차별 폭력이 스탈린의 성격과 인간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머리는 꽤 좋아 조지아어,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튀르키예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술주정뱅이가 되기 전에는 인간적 매력도 상당했고, 가정적이었으며 사업도 잘 되어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결혼을 시기한 마을 여성들의 악질적인 소문과[* 스탈린의 친부는 다른 사람이다 카더라~ 류의 소문. 실제로 스탈린도 사석에서 사실 자신의 친아버지는 어린 자신과 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마을 성직자가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붕어빵 같은 부자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시피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 돈 대신 술을 내는 조지아 특유의 관습 탓에 나날이 과음하여 결국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렸다. 결국 베사리온은 1883년에는 미친 사람으로 불리며 걸핏하면 싸움을 일삼는 망나니가 되었다. 이런 아버지를 어린 스탈린은 두려워하며 피했고, 이에 분노한 베사리온은 스탈린을 쥐 잡듯이 패고 트집 잡으며 사생아라 욕했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는데, 언젠가는 맞아 피투성이가 된 스탈린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경찰을 데리고 오거나 칼을 던져 막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겨우 스탈린이 만 4살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베사리온의 알코올 중독은 더 악화되어[* 이 때문에 사망했을 때의 사인이 [[간경화]]였다. 일설에서는 술에 가득 취하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화난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나중에는 벨트를 팔아 술을 사먹는 지경으로 전락해[* 조지아가 속한 캅카스 지역에서 벨트를 판다는 것은 인생 막장을 의미한다.] 이곳 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즈음에 스탈린은 마차에 치여 왼팔을 다쳤고 평생 왼팔이 불편한 장애가 남는다. 1884년, 베사리온은 스탈린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아내 케케의 주장을 무시하고 스탈린에게 제화 기술을 가르쳤으나, 이로 인해 스탈린은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곰보가 생긴다. 베사리온은 스탈린이 낫자마자 바로 집을 나가버리고는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케케는 재봉사 일을 하며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스탈린을 키웠다. 이후 케케는 스탈린을 정교회 주교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에 보내려 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베사리온에 의해 스탈린이 구두 공장으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베사리온은 집을 나가 떠돌다가 구두 공장에 취직했는데 아들인 스탈린도 같이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신학교와 여러 고위 관료들이 도와줘 스탈린은 신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스탈린은 평생 아버지를 증오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보여준 성격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가정 폭력을 꼽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베사리온처럼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는 것. 베사리온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이미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정 폭력은 일상적인 모습이었으며, 따라서 특별한 원인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스탈린의 어머니, 케케 겔라제는 폭력적인 남편과는 반대로 매우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으며 비록 엄격한 체벌을 하기도 했지만 자식에게 헌신적이며 따뜻한 어머니였다.[* 그래서 스탈린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특히 나중에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어머니를 [[트빌리시]]의 옛 캅카스 총독 관저에 살게 하고 경호원들까지 붙여줄 정도로 특별 대우를 해주었으며, (말년에는 뜸해지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어머니랑 편지도 주고받고 때때로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트빌리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기장으로서 열심히 종교를 탄압하던 스탈린이었지만 어머니한테는 차마 신앙을 버렸다고 고백을 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독실한 신자 행세를 했다고 한다.][* 1935년 10월에 스탈린은 오랜만에 어머니와 재회했는데, 이때 스탈린은 "왜 저를 그렇게 세게 때리셨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때 케케는 "그렇기에 너가 잘 자랐단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뒤 케케는 "이오세브, 요즘 뭐하고 지내니?"라고 안부를 물었고, 스탈린은 "[[차르]]를 기억하십니까? 제가 일종의 [[서기장|차르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케케는 아들이 [[신부(성직자)|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케케는 어린 스탈린을 초등학교에 다니게 하고 신학교로 진학시켰다. 시작은 매우 좋았다. 그 시기 스탈린의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당시 스탈린은 지도자로서 아이들을 이끌고 싶어했고, 카리스마를 보여 12살에 18살 상급생을 부하로 거느렸었다. || [[성경]] || 5 || || [[https://en.m.wikipedia.org/wiki/Russian_literature|러시아 문학]] || 5 || || [[역사]] || 5 || || [[수학]] || 5 || || [[조지아어]] || 5 || || [[라틴어]] || - || || [[그리스어]] || 4 || || [[교회 슬라브어]] || 5 || || 조지아-이메레티 노래 || 5 || [*성적표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서 발췌함.] 5점이 만점이다. 이후 스탈린은 [[찰스 로버트 다윈|다윈]]의 책 등을 접하며 점차 무신론, 반정부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뤼도 마르턴스에 따르면 스탈린이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비밀 단체를 알게 된 때는 15살 당시 신학교 2학년 과정에 있었던 때라고 한다.] 《Stalin, Man of History》라는 책을 쓴 이안 그레이(Ian Grey)에 따르면, 1897년에 학교의 부 지도 주임은 주가슈빌리가 샤를 르투르노(Charles Letourneau)의 《세계 여러 민족들의 문학의 발전(Literary Evolution of the Nations)》을 읽는 것을 적발했다고 썼는데, 이전에 주가슈빌리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바다의 노동자(Toiler of the sea)》, 이후에는 위고의 《93(Ninety-three)》을 읽다가 적발되었으며, 총 13번이나 금서를 읽다가 적발되었다고 한다.[* Ian Grey, 《Stalin: Man of History》, New York: Doubleday & Co, 1979, p.20~21.] 그리고 고리 신학교가 파업으로 폐쇄되자 힘들게 트빌리시 신학교[* 참고로 이 학교는 억압적인 학교로 유명했다.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1884년엔 학생 한 명이 교장을 폭행해 퇴학당했고, 1886년엔 학생이 교장을 찔러 죽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로 전학을 갔으나, 억압적이며 조지아 문화 대신 러시아 문화를 강요하고, 차르에게 복종하라는 학교에 반항해 혁명과 조지아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면서 걸핏하면 학교에 안 나오는 등 학업에 소홀해지자 장학금이 끊어졌고, 결국 스탈린은 마지막 학년에 학교를 [[자퇴]]한다. 기록상으로는 수업료 미지불로 인한 [[제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로버트 서비스 등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장학금 480루블은 안 돌려줘도 되니 제발 돌아와만 달라는 학교의 수 차례에 걸친 요청을 거부했고, 덤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까지 털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교외 활동을 금지한 교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소셀로(სოსელო, '작은 소소')란 필명을 사용해서 1895년부터 1896년 사이 6편의 시를 발표했다. 시의 주 내용은 조지아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데뷔작인 〈[[https://wikisource.org/wiki/მთვარეს|달에게 보내는 편지]](მთვარეს)〉는 일리아 차브차바제(ილია ჭავჭავაძე, [[1837년]] [[11월 8일]] ~ [[1907년]] [[9월 12일]]) 공이 창간한 주간신문《이베리아(ივერია)》의 지면으로 실린다. > 〈달에게 보내는 편지〉 > > 지상의 비밀스런 먹구름 위를 > 예전처럼 거침없이 부유하라. > 그대의 은빛 광채로 > 짙은 안개의 어두움을 흩날리라. > > 잠에 취해 몽롱한 대지에 > 보드라운 미소로 고개를 기울여 > 캅카스 최고봉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라. > 그대를 향해 높이 솟은 얼음 봉우리에게. > > 그러나 언젠가 박해당해 유골이 된 이도 > 시인들이 잠든 그 신성한 언덕에 올라 > 희망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수 있음을 > 분명히 알라. > >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라. > 창백한 빛으로 뛰놀라. > 예전처럼 한결같은 빛으로 > 나의 조국을 비추라. > > 나는 그대에게 가슴을 열고 > 마주 향해 손을 내밀고 > 또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 밝은 그대를 보겠노라. 또 다른 시 〈[[https://wikisource.org/wiki/დილა|아침]](დილა)〉은 당시 조지아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어체로 쓰여졌다. > 〈아침〉 > >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 >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 > 꽃이여, 아 나의 조지아여! >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 친구들이여 노력해 > 빛내라, 조국을! 이아코브 고게바슈빌리(იაკობ გოგებაშვილი, [[1840년]] [[10월 15일]] ~ [[1912년]] [[6월 1일]])라는 조지아의 유명 교육자[* 조지아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이끈 민족주의 성향의 운동가로 아동문학가로도 유명하다. 소련 시절에도 일부 저작물이 재간행 되기도 하였으며 1940년 조지아 최고 예술인과 유명인들이 묻히는 므타츠민다 판테온의 묘지로 이장되었다.]는 그가 집필한 [[교과서]]에 이 시를 넣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조지아 귀족들의 선집에까지 시가 실리는 등 당대 스탈린은 조지아의 명망 있는 문학가였다.[* 소련의 절대 권력자가 된 이후에야 시가 아니라 발언 한 마디 한 마디가 교과서에 들어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지만, 무명의 일개 학생이던 시절에 쓴 시가 교과서나 선집에 실릴 정도였다는 것은 정치가 아닌 순수하게 문학에 매진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조지아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길 만한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도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고등학생 수준 정도로 그리 높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조지아어 구사 능력은 탁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상습 결석에 책까지 털어간 불량 학생에게 장학금 안 돌려줘도 되니 학교로 돌아와만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요청했다는 학교 측의 태도 역시 스탈린의 이런 재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스탈린이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로는 주로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했고, 서기장에 등극한 이후에는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러시아어를 쓰며 보내다 보니 모국어인 조지아어는 다소 서툴러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